영생을 믿어야 할까?
우리의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다분히 사실적 논제다. 사실적 논제에 대해서는 거론할 가치가 없다. 현생 이후의 신의 법칙은 우리가 모를 뿐 이미 정해져 있을 테니 말이다. 거론의 여지가 있다면 영생과 심판에 대한 우리의 믿음 체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에 대해서일 것이다.
수년 전 1,000여 명의 마지막 삶을 배웅한 경험을 담은 능행 스님의 책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를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있다. 책 속에는 말기암 환자인 젊은 친구가 3일 후 죽음을 맞이한 내용이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육체는 병이 들어 생물학적인 작용이 멈춰 죽음을 맞이했다지만 어제까지 또렷했던 의식이나 영혼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영혼을 무엇으로 죽일 수 있을까? 만약 영혼은 죽지 않고 불멸하는 것이라면?
나름대로 여러 가설을 세워 보았다.
첫째, 영혼도 육체가 있을 때 에너지의 발현이 활발한 만큼 육체가 멈추면 영혼도 서서히 힘을 잃으며 결국에 사멸할 것이다. 둘째, 육체와 다르게 영혼은 죽일 수 있는 어떤 방안이 없으니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셋째, 개인의 영혼은 기의 형태로 흩어져 존재하다가 여타의 에너지들과 결합 등을 이룰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한 개인의 온전한 영혼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내가 추론한 것은 위 세 가지 경우이다. 마음은 두 번째를 믿고 싶지만 역시 알 수가 없다. 사후 세계를 경험했다는 많은 얘기들이 있지만 모두가 주관적 체험을 통한 주장의 산물일 뿐 현생을 살고 있는 어느 누구도 객관적으로 증명을 하지는 못했다. 왜 그러한가! 우리 모두는 신이 구축한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합에 뛰고 있는 선수보다는 밖에 있는 감독이 훨씬 더 경기의 흐름을 잘 읽는다. 경기 속에 빠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우리를 둘러싼 이 환경과 질서를 벗어나 우리가 뛰고 있는 이 경기장을 관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다투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피조물간에는 믿음이나 행위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만 피조물의 어떤 행위나 신념이 창조자의 법칙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영생이 있다면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똑같이 그 혜택을 누릴 것이며 없다면 역시 없는 대로 동일하게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문제로 고민할 일이 아니다. 그냥 “신의 뜻대로 하소서” 하는 자세가 심신 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한마디로 신은 말이 없다. 단지 법칙으로 존재할 뿐이다.
신의 심판이 따른다는 내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인격신을 들어 우리의 믿음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주어진다는 특정 종교의 가르침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믿음이라는 것은 불변의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념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변화의 인자를 내포하고 있다. 만약 인간의 믿음 여부에 따라 창조주의 심판이 결정된다면 믿음의 기준은 생애 어느 기간을 설정해야 할 것인가? 죽는 순간이 기준인가, 아니면 생애 내내 점수를 매겨 평균을 적용하는 것인가?
신앙인이든 아니든 신의 섭리는 오늘도 똑같이 내려오고 있다. 피조물의 믿음 행위에 따라 신이 심판을 달리한다면 이것은 창조주가 오히려 피조물에게 종속당한 꼴이 된다. 백 번 양보해서 그런 법칙을 실제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면 창조주를 참으로 조잡한 놀이를 즐기는 애정 결핍 환자로 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과연 그런 옹졸한 존재일까?
행복공감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0개의 댓글